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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에 대한 논의 - 근대 건축물 보존

  • 작성자 사진: O Kim
    O Kim
  • 9월 12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10월 14일


근대와 로컬의 해체


존재된 것이 사라지는 경험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 가를 묻는다. 본 글은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시기에 소멸한, 그러나 여전히 보존의 가치를 지닌 건축물에 관한 이야기다.


근대가 현대에 남긴 상징성과 의미, 그리고 보존 가치에 대한 논의와 그 범위(기준)을 설정함에 있어 다양한 시선들이 혼재한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는 근대화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근대화를 위해 버려져야 했던 것은 로컬(Local)이었다. 근대화가 기존의 연결고리들을 모두 없앤 후 재구성한 이 영토에는 원주민적인 것도, 토착적인 것도, 원시적인 것도 없다. 로컬[근대화 이전의 로컬]은 비교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반-글로벌(anti-Global)을 의미한다.”

라투르의 지적처럼 근대화는 로컬을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과정이었다. 전통(토착·지역적 의미)과 현대 사이에서 전통적 가치관을 재편하고 현대 사회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로, 건축 분야에서도 현대와 구분되는 독특한 전환기를 의미한다.


제주의 근대화는 1950-60년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해방 및 60년대 군사정권 이후 부터 본격적인 행정 체제가 개편되며 개발의 흐름이 불었다. 도시 기반 시설과 공공 건축이 빠르게 확장되는 가운데 학교, 시청사, 극장과 같은 유형의 건축물이 등장하며 제주의 근대적 경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건축물은 터만 남았다. 익숙해진 환경 속에 흡수되거나 장소기억으로 희미하게 남아 그 자리에서 켜를 이루고 있다. 본 글에서는 근대 제주의 전환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3곳의 터-(구)제주대학교, (구)제주시청사, (구)제주현대극장-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사례 1: (구)제주대학교의 터

ㅡ 사라진 건축, 잃어버린 기회


ⓒ한라일보
한라일보

















1962년 제주대학교가 국립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캠퍼스 확장을 위해 김중업 건축가에게 본관 설계가 의뢰되었다. 그는 한라산의 줄기와 바다로 이어지는 지형성을 고려해 '날아가는 듯한 비약의 움직임'을 건축에 담고자 했다. 이러한 조형적 언어는 당시 제주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건축의 신선한 첫 인상으로 남아있다. 구불구불한 경로의 조형미와 역동감,경사로의 역동적 조형, 원형 화장실, 4층 데크에서 펼쳐지는 바다 풍경 등 쾌한 기억들이 남아 장소 기억을 형성했다. 김중업이라는 대가의 이름을 지우더라도, 건축물 자체의 감동이 각자의 시간과 더불어 추억으로 자리한 기억들이다.


1964년 설계에 착수한 뒤, 1967년 일부 준공을 거쳐 1970년에 완공되었다. 제한된 부지 내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함과 동시에 많은 요구조건을 수용하면서 개선·시정된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친 것으로 보인다. 1982년 아라캠퍼스 이전으로 건물은 방치되었고, 1990년 붕괴 위험 판정을 거쳐 1995년 철거되었다.


제주라는 지역에서 김중업의 제주대학교 본관은 지역성의 해석과 함께 당시에 급진적인 반향을 일으킨 건축물이 아니었을까? 이는 반-글로벌이 아닌, 로컬과 글로벌적인[근대화된] 건축 언어를 한데 모으려는 실험이 소멸된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건축물이 남아있었더라면 제주 건축이 나아가는 방향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김중업 선생이 1965년에 설계한 서귀포중앙여중학교 수산학부 본관이나 1956년에 설계한 (구)건국대학교 도서관(현 건국대 언어교육원)은 지금까지도 존치되어 잘 활용되고 있는 현황을 보면, (구)제주대학교 본관의 소멸은 더욱 아쉬운 대조를 이룬다.




사례 2: (구)제주시청사의 터

ㅡ 행정 도시의 상징에서 사라진 터까지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1955년 제주시가 읍에서 시로 승격되면서, 새로운 행정 중심 공간이 요구되었다. 박진후 건축가가 설계한 (구)제주시청사는 1959년 준공되었고, 제주 최초의 시멘트 벽돌조 건축물로 기록된다. 근대 도시 행정의 상징적 건물로서, 당시 시민들의 기억 속 시청사는 기능 이상의 인상을 남겼다. 계단 중간의 큰 유리창으로 쏟아지던 햇살, 궁궐을 연상시키는 기와지붕, 그리고 행정 중심지로서의 활력은 단순한 업무 시설을 넘어 공동체의 일상과 기억이 담긴 사회적 장소로 작동했다.


그러나 1980년 현 시청사(구 도청사)로 기능이 이전된 후 건물은 매각되었고, 제도적 보존 장치 없이 방치되었다. 결국 2012년 철거되면서 그 터는 관덕정 공용주차장으로 전환되었다.


(구)제주시청사의 소멸 과정은 근대 건축물의 가치 평가와 보존에 관한 매끄럽지 않은 현 세태를 드러낸다. ‘역사적 관청 건물은 모두 보존해야하는 가?’라는 관점과 ‘역사라는 것은 수많은 것 중 선별된 것만이 남는 것인데, 제주시청사는 그런 의미가 다분한 건물’이라는 가치 평가 사이에서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구)제주시청사는 제주 목관아로부터 행정 중심지의 상징성을 이어받은 건축물로, 사회적 변화를 설명하는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그 소멸의 의미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공공 건축물은 집단적 기능뿐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 공동체로서 응집되는 장소로 작동하기에 더욱 그렇다.


사회적 당위성을 갖는 건축물의 보존은 역사와의 시간적 연결을 이어가는 방안이 아닐까? 주차장이라는 용도를 내세워 어떠한 보존장치 없이 흔적을 지워버린 것은 일시적 편의를 선택한 결과이다. 모두 철거된 가운데, 조선시대의 사창터(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를 알리는 표지석만이 외변에 덩그라니 남아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제주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작업(2003년)부터 제주목관아 보존·관리 및 활용계획(2011년)까지 다양한 정책연구가 있었음에도 이러한 노력들이 기사로만 남아있는 사실은 건축사의 사회적 역할 확장의 필요성을 환기한다. 이러한 과제는 (구)제주현대극장의 사례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발견된다.




사례 3: (구)제주현대극장의 터

ㅡ 근대적 문화 공간의 소멸과 애도의 과제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마지막으로 살펴볼 (구)제주현대극장의 터는 1960년대 제주 극장의 르네상스 시대를 함께 풍미했던 곳으로 이미 사라진 코리아극장과 제일극장, 아시아극장을 함께 떠올리게 하는 매개물이자, 제주의 대중문화와 연결된 장소였다.


1944년 도내 최초로 '제주극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이 건물은 특정 기간 이후 현대극장으로 불리며 지역민의 문화에 대한 기억을 담아왔다. 그러나, 안전진단에서 가장 낮은 등급인 E등급을 받으면서 결국 2018년 12월 31일자로 생애주기를 마감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보존이 불가능한 경우, 우리는 어떻게 그 문화적 의미와 집단기억을 보존할 수 있을까? 특히 지역민의 애착이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소멸되거나, 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시대적 건축물은 그에 따른 ‘애도’를 체계적인 기록화 과정을 통해 보전해야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종합해보면 예시된 건축물의 생애주기는 짧게는 30년에서 80년 정도로, 이는 물리적 수명이 아닌, 근대에서 현대로의 전환 과정에서 발생한 가치 판단의 결과이다. 라투르의 언급처럼 근대화 과정에서 로컬(Local)이 소거되었다면, 역설적이게도 현대화 과정에서는 근대 자체가 또 다른 소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단순히 건축물의 상실이 아닌 장소기억과 지역성의 점진적 상실이 진행되고 있다. 보존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시스템적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지역의 특수성은 점차 정체성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건축가는 사회적 역할을 확장하여 참여적 보존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광범위한 인식 개선과 협력체계 등 모두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다.




Written by Copywriter Sihi Kim

(주)김오건축사사무소


● 본 글은 「월간제주건축 제78호」에 수록된 글을 바탕으로 다시 엮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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