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성당 건축과 공동체에 관하여
- O Kim
-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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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10월 14일
성당 건축과 공동체
건축 역사에 있어, 종교 건축은 한 시대를 드러내는 축으로써 또 다른 공동체적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종교’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넘어, 특정 신념과 가치 체계를 공유하는 이들이 모여 삶의 의미를 쌓아가는 구심점에 가깝다. 그리고 공동체란 ‘우리’라는 소속감을 느끼며 상호작용하는 집단으로, 종교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정신적 토대로 작동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역사회와 공동체, 특히 제주에서의 공동체 개념은 건축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개념이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 안에서 ‘공동체 의식’은 삶의 방식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제주 특유의 결, 제주다움으로 발현된다고 생각하며 이는 나의 건축 철학과도 같다.
한국의 종교건축은 크게 불교 사찰과 기독교 건축으로 나뉘며, 기독교 건축은 다시 가톨릭의 ‘성당’과 개신교의 ‘교회’로 구분되며 이 외에도 많은 종교가 자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당은 누구나 접근가능한 장소로서, 많은 공동체적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성당 건축과 역사적 맥락
서구 종교의 유입과 확산은 한국 근대 건축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흐름을 보여준다. 서구의 기독교 건축이 한국에 닿은 시기는 ‘개화기(1883-1910)’로, 이 시기의 대표적 건축물은 약현성당(1892), 명동성당(1898) 등이 있으며, 제주에서는 제주중앙성당(1899), 하논성당(1900)이 세워졌다.
개항은 종교 건축의 개화기였지만, 일제 강점기 아래 종교 탄압으로 그 흐름은 위축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복구기(1945-1962)를 거치며,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 건축계 또한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단순히 서구의 건축 양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한국적 정서’에 대한 뿌리 깊은 고민 속에서 화강석이나 벽돌 같은 친숙한 재료의 사용과 특정 영역을 마당으로 설정하는 공간적 개념, 신앙에 대한 추상적 상징 등을 건축적 어휘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제주의 종교 건축은 고유의 환경과 지역사회와의 연계 속에서 자생적인 발전 과정을 거쳐왔다.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제주 지역 천주교는 1858년(철종 9)에 펠렉스 베드로(Felix Peter, 吳尙善)가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1899년 프랑스 신부들이 파견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제주 고유의 토착 신앙 및 전통 인식과 충돌하였고, 결국 1901년 제주도민들이 교인과 프랑스 세력을 상대로 봉기한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으로 폭발하는 극심한 시련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갈등의 역사는 역설적으로 제주의 천주교가 지역 사회와 공존하는 방식을 모색하는 과정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기존의 초가나 마을의 창고, 민가 등을 임시 성당으로 활용하였던 초기의 모습은 제주 특유의 풍경을 만들어냈고, 현재에도 중문본당(1988), 남원본당(1997) 등이 남아 지역 공동체에 스며든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제주중앙성당(김창우 건축사, 2000)

1899년 4월 22일, 제주의 중심 ‘한짓골(제주읍 남문에서 관덕정을 잇는 큰 길)’에서 제주 최초의 천주교회 본당이 설립된다. 당시에는 9칸 규모의 초가집을 매입하여 성당으로 활용했으며, 이후 기와집으로 개조되었다.
1930년이 되던 해에는 현재의 위치에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 성당이 올라섰고, 1960년대에는 신자 수 급증으로 인해 기존 성당은 철거되고, 1969년 새로운 성당이 건축되었다. 이후 1971년 광주대교구에서 분리되어 제주지목구가 설정되었고, 1977년 정식 교구로 승격되면서 천주교 교세 성장을 위한 체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교세의 성장 속에서, 현재의 중앙성당은 4번째 성당으로 1997년 착공하여 2000년 완공되었다. 김창우 건축사님(우신건축)의 작품으로, 높은 첨탑과 웅장한 높이의 진입부를 올려다보면 장엄함과 신성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아래로 곧게 뻗은 계단을 한 단씩 올라서면서 일상적인 영역에서 성역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일상 속에 자리한 초월의 공간이다. 누구나 어느 때에 다가설 수 있고, 아치형 천정고와 벽돌로 만들어진 내부는 방문한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으며 신앙 공동체의 본질에 집중하게 한다. 제주교구의 주교좌 성당(Cathedral)으로서, 모든 이를 포용하려는 상징성과도 맞닿아 있다. 본 건축물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 제주시 건축상을 수상하였다.
서문성당(김창우 건축사, 1977)

서문성당은 1977년 6월 30일 중앙성당에서 분리하여 설립되었는데, 이는 제주시의 가톨릭 인구 증가에 따른 자연스러운 본당 확장 과정을 보여준다. 서문성당은 이후 1981년 11월 1일 신제주성당을 자본당으로 분리시켰고, 이 후에도 30여 개의 본당으로 확장하게 된다.
현재의 서문성당은 1994년에 완공된 건축물로, 당시 건축계의 화두였던 ‘지역의 재료와 형태’에 대한 고민을 따뜻한 공동체 공간으로 만드는 것으로 풀어냈다.
대지를 감싸 안은 듯한 배치와 진입부의 중첩된 아치 형태가 문턱을 낮추고 누구나 자연스럽게 진입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는 권위적 공간이 아닌 신자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공동체적 공간을 마련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내부 공간은 이러한 분위기를 한 층 깊이 있게 만들어내는데, 지역의 ‘송이벽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토착적이면서도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에 길쭉하게 솟은 아치형 창문들이 절제된 상승감을 부여하고 있다.
편안하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공동체를 응집시키는 친근한 장소로 기능하는 것이다.
신제주성당(김석윤 건축사, 1993)

1981년 서문성당에서 분리 승격된 신제주성당은 제주 1기 신도시인 연동지구 개발이라는 도시의 성장과 함께했다. 연동 신시가지로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면서, 신제주성당은 ‘새로운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김석윤 건축사님(김건축)의 설계로 1993년 완공된 본 건축물은 이러한 구심점의 역할을 건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건립 당시 주변은 허허벌판에 가까웠기에, 이 상징적인 건축물이 주는 존재감은 지금보다 훨씬 강렬했을 것이다.
신제주성당의 상징성은 외관에서 압도적으로 드러난다. 투박하고 거친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종탑은 그 자체로 강렬한 수직적 상승감을 만들어내고, 종탑을 축으로 하늘을 향해 솟구친 지붕의 선은 그 자체로 경외감을 자아낸다. 이 압도적인 상승감은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고, 궁극적인 초월적 체험으로 이끄는 지향을 상징한다.
내부 공간은 시각과 청각, 공간의 밀도까지 인간의 모든 감각이 본질을 향하도록 세심하게 조율되어 있다. 적당한 감도로 울려 퍼지는 소리의 잔향, 제단을 중심으로 모든 시선과 동선을 모으는 대각의 구도, 제단에 스며드는 빛 등 공동체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공간 구성 그리고 보는 이를 압도하여 스스로 자세를 낮추게 만드는 천정 구조의 장엄함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가 몰입의 공간을 완성하고 있다.
‘우리’의 삶을 둘러싸는 환경
대표적으로 언급된 제주의 성당들은,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 유입이라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바탕으로서 건축이 대응해온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한데 모으는 장소이자 시대가 요구하는 ‘공동체’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또 건축적 환경으로 담아냈다.
제주의 성당 건축은 이러한 역할을 지역의 맥락 안에서 형성해왔는데, ‘한국성’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속에서 전통과 지역적 개념에 대한 고민을 건축적으로 녹여냈다. 현무암과 송이 벽돌의 사용은 그 자체로 지역성을 드러내며 재료와 상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결과물로 높이 평가받는 동시에, 이를 어떻게 계승·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남긴다. 제주 건축이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은 지역 공동체를 온전히 담아내는 환경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그 환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면서 살아간다. 이렇듯 건축과 공동체는 함께 역사가 된다.
Written by Copywriter Sihi Kim
(주)김오건축사사무소
● 본 글은 「월간제주건축 제83호」에 수록된 글을 엮어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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